목표 없는 인간
지금까지 해온 일을 하나하나 꼽아보니 도서관 사서, 여행사, 유학원, 무역회사 서무, 상담원인데, 자잘하게 했던 아르바이트까지 쳐보면 호프 서빙, 던킨도너츠 점원, 영어 번역, 중국어 과외, 공원 청소원, 삽화 아르바이트, 프리랜서 출판 디렉터 비서, 외국인 교수 조교까지... 참 종류도 다양하게 아무렇게나 손닿는 대로 일을 해왔다. 졸업하고 나서도 별 목적도 없이 아무 일이나 봉급과 시간만 맞으면 일하면서 하릴없이 20대 중반만 축내고 벌써 28세다. 문득 나이를 깨닫고 나니, 또래들이 기업, 공무원, 사업 등 나름대로의 적성을 찾아 이미 백년대계를 세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한가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이제서야 앞으로 남은 팔십년-우리 때는 120세까지 산다고 하지만-이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나와 영 딴판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불과 일 이년이 되지 않는다. 내게는 매우 유별난 사람인 H군이 2002년에 대학을 입학하고, 2004년에 입대한 후 2년 후 제대한 뒤 현재(2009)까지 대학을 다니는 모습을 햇수로 8년 동안 보아왔다. 처음에는 만화와 영화, 여행을 좋아하는 괴짜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보였고, 대학 입학 후에는 내가 대학 2년까지 그랬듯 동아리 활동과 여자 친구에 푹 빠져 공부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듯 보였다. 그랬던 H가 전역 후 갑자기 1년간 여행사 일을 하면서 세상의 맛을 보더니, 복학 후 전에 없던 모범생이 되어 온 교수와 학우들이 칭찬을 마다않는 훌륭한 학생이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전공과 관련이 있는 대화를 하고, 취미라고 해야 인터넷 정보 서핑, 영어 원문의 보드게임, 영화다. 졸업 후를 이야기할 때는 어느 해외 대학의 모 교수 밑에서 석사나 박사 과정을 보내는 것에 대해 마치 눈앞에 결정된 일을 말하듯이 한다. 나는 그 때마다 계획적이며 자신감에 찬 H군이 부러워 미칠 듯 했다. 나는 왜 대학 시절에 내가 무엇을 공부하는지, 이 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어릴 때부터 나는 남보다 무엇이든 이해가 빠른 편이어서, 무엇이든 조금만 해도 금세 척척 해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늘 그게 문제였다. 시골 학교라는 작은 우물 안에서 자족하며 노력이라는 것을 배울 기회가 없던 내가 서울 사대문 안의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처음으로 남들보다 앞서 나가지 못해 좌절하게 되었다. 그 경험은 더없이 신선한 충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칭 천재형에서 타칭 노력형으로 바뀌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좌절에 맛들었달까,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음울한 못난 20대 초반을 즐겼다.
물론 나도 1년 반 동안의 휴학을 하고 여행사에서 일을 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였지만 정직으로 전환해 일할 정도로 회사에서 신임을 받았고, 미지의 세상을 돈을 벌면서 다닐 수 있는 투어 컨덕터(T/C)에 대한 꿈이 부풀어 자격증까지 땄다. 하지만 복학을 하고 전공을 다시 대하니 늘 사람에 치이면서 험한 곳을 다녀야하는 T/C도 보잘것없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딱히 중국어를 해서 내가 뭔가 될 성싶지 않았다. 사실 남들처럼 TOEIC이나 IELTS를 공부하며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려야 할 때였는데, 나는 아직 꿈이 덜 깬 사람처럼 언제나 내 쉴 곳 있는 동아리 방이나 기웃대는 복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휙 하니 시간이 가서 졸업 후 나는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잉여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에 말한 것처럼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3년이 지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조금만 해도 노력한 댓가 이상을 얻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남들이 꿈과 야망을 가지고 높은 히말라야를 오를 때 나는 얕은 뒷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뒷동네도 봤다 하고 좋아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계속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 것에 지겨워져 앞으로의 80년을 걱정하게 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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